자꾸만 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.
집단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서 룰은 반드시 필요할텐데, 왜 나는 그것이 싫다고 느껴질까?
어쩌면 극단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런 내 태도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일까?
오랜 생각의 끝은 이렇다. 이 고민의 원인은 내 마음속에 룰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.
세상의 룰은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겠다. 첫째는 공통의 생활을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룰들 이다. 예로, 공동의 회의실은 예약을 한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자거나, 공동의 장비는 이렇게 이렇게 사용하자거나, 좀 더 민감하게는 연구비 지원은 이러한 룰에 따라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이다. 이런 종류의 룰을 지키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가하게 되고, 피해를 주게 된다. 그러니, 이런 성격의 룰은 모두 잘 지켜야 한다. 그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도 하다. 나도 이런 룰은 잘 지키도록 노력해야지.
두 번째 성격의 룰은 구성원의 도덕적 가치기준을 낮게 평가해서 생겨난 룰들이다. 내가 KIST에서 일하면서 보았던 것중 가장 치욕적인 것은 출퇴근시 신분증 찍기였다. 그것을 가지고 야근 많이 한 사람을 칭찬하는 유치하기 이를데 없는 룰. 그 발상의 단순함. (애구 챙피해라.) 연구비 가지고 학회의 연회비를 내면 안 된다거나 (학회활동을 취미로 혹은 정치활동의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므로), 연구비로는 digital camera를 사면 안된다거나 (사유화될 수 있으므로), 컴퓨터는 오락으로도 사용되므로 연구비로 사면 안된다거나, 삐삐가 한참 유행할 때는 AAA 바테리를 연구비에서 사면 안된다거나 (AA는 괜찮다. 삐삐에 안 들어가니까), 소액과제는 1000만원을 넘으면 안된다거나 (개인이 쓱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과제이므로), 출장간 날 일마치고도 연구실로 다시 들어가면 안된다거나 (출장 안가고 출장비 쓱싹했을까봐) .... 그랬겠지, 그렇게 쓱싹한 사람도 있었겠지. 그렇다고 이런 룰 만들면,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을 불편함과 그 비효율은 어떻게 하라고..... 이런 것 때문에 연구결과가 미진하다면, 그건 이런 룰을 만드는 사람의 책임이기도 하다. 룰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억하시라. 이런 종류의 룰은 첫 번째 종류의 그것과 달리 대부분의 구성원을 불편하게 한다.
내가 혐오하는 그래서 항상 열받는 룰은 두 번째 종류의 것들이었다. 만세! 나는 알았네. 내가 싫어하는 것이 어떤 건지를 이제는 명확히 알았네.....
(2000. 11. 28)